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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당오래된 직함

제27장

오래된 직함

퇴원 다음 날 도윤에게서 사진이 왔다.

마지막 수정 2026-11-06 · 한 번에 펼쳐 읽기

퇴원 다음 날 도윤에게서 사진이 왔다.

집 근처 편의점 영수증이었다. 물과 두부, 작은 우유 하나를 샀다. 왜 영수증을 보냈는지 물으니 혼자 다녀왔다는 뜻이라고 했다.

나는 웃으며 답했다.

〈잘했다.〉

곧바로 답이 왔다.

〈애 취급하지 말라니까.〉

그가 먼저 보여 줬으니 반응을 해도 불평을 들었다.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일했다. 잠시 뒤 다시 집어 들었다.

〈밖에 나가니까 어땠냐.〉

이번 답은 늦었다.

〈좀 무섭더라. 그래도 갔다 왔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봤다. 괜찮냐는 질문보다 어땠냐는 질문에 더 많은 대답이 돌아오는 날이었다.

회사에서는 복귀 준비를 했다. 도윤은 주치의 의견과 필요한 절차를 확인한 뒤, 우선 짧게 출근해 인수인계를 시작하기로 했다. 정상 근무를 바로 다 소화하지는 않을 예정이었다. 팀장 권한과 내 임시 역할의 종료 시점은 회사에서 정리했다.

나는 인수인계 문서를 고쳤다. 일을 한 목록만 적으면 자랑처럼 보였다. 잘 안 된 일까지 적으면 변명처럼 보였다. 결국 현재 상태와 남은 결정, 다음 담당자를 중심으로 바꿨다. 누가 읽어도 바로 움직일 수 있게 쓰려고 했다.

유진이 읽어 보고 한 줄을 고쳤다.

“이건 차장님이 바꾼 게 아니라 같이 바꾼 거잖아요.”

나는 ‘조정함’ 앞에 팀 협의라는 말을 넣었다.

준서는 도윤에게 어떤 인사를 해야 할지 물었다. 잘 돌아오셨다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많이 아프셨냐고 물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렇다고 했다.

“안 물어봐도 돼. 본인이 말하면 듣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처음 병실에 들어갈 때 같은 고민을 했다. 다들 아픈 사람을 걱정하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저녁에는 도윤 집에 서류를 가져다줬다. 집 앞에서 전화를 걸었는데 벨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문이 열리기까지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나는 재촉하지 않았다.

도윤은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약과 작은 물병이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식사를 준비하고 계셨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나는 서류만 놓고 가려 했지만 어머니가 밥을 먹고 가라고 하셨다. 도윤이 내 일정도 안 물어보고 수저를 꺼냈다. 나는 서연에게 연락해 늦는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먼저 말했다.

식탁에서 어머니는 회사 일을 물었다. 나는 도윤을 쳐다봤다. 그가 먼저 말했다.

“도현이가 나보다 잘해.”

어머니가 반색했다.

“그러면 좀 배우면 되겠네.”

나는 물을 마시다 웃음이 났다. 도윤은 그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했다. 어머니는 무슨 뜻이든 잘하는 것은 배우라고 했다.

식사가 끝난 뒤 도윤이 작은 컵에 차를 따랐다. 나는 회사 문서를 꺼내지 않았다.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하는 오래된 영화를 보며 배우 이름을 두고 다퉜다. 휴대전화로 확인해 보니 둘 다 틀렸다.

도윤이 말했다.

“이 배우가 이 사람이었네.”

나는 웃었다.

“우리 둘이 맞으면 무슨 재미냐.”

그는 고개를 저었다. 틀리는 것을 재미로 받아들이는 데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집을 나서기 전 도윤이 내게 말했다.

“복귀하면 내가 일단 들을게.”

“뭘.”

“바뀐 거. 왜 바꿨는지부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설명 너무 길게 하면 끊어도 돼.”

도윤은 잠깐 나를 보더니 말했다.

“그건 원래 끊었어.”

나는 웃었다. 그는 아직 웃음이 오래 이어지면 배가 당기는지 손을 얹었다. 우리는 웃음을 조금씩 나눠서 해야 했다.


복귀 전날 도윤은 처음 팀장 발령을 받았을 때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는 그의 집에서 식사를 마친 뒤였다. 어머니가 주방에 계셨고 텔레비전 소리는 작았다. 도윤은 뜨거운 차를 앞에 두고도 마시지 않았다.

“그때 너한테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가 말했다.

나는 회식 자리의 맥주 냄새를 떠올렸다.

“기억해.”

“왜 그랬는지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도윤은 손가락으로 컵을 돌렸다.

“네가 나보다 잘하는 게 많았어. 그런데 내가 맡으니까 좀…”

그는 문장을 끝내지 못했다. 나는 그가 나를 위로하려고 말을 만드는 것인지 생각했다. 오랜 친구를 믿는 일에도 이렇게 못난 의심이 붙었다.

“나도 그때 속이 아주 편한 건 아니었어.”

내가 말했다.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축하한 건 진짜야. 그런데 왜 나는 아니지, 그 생각도 했어.”

입 밖에 내니 생각보다 초라하지 않았다. 그냥 있었던 마음이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너한테 더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

“공정하게?”

“응.”

나는 컵을 들었다가 내려놨다.

“나한테 더 엄격한 건 공정한 게 아니잖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친구 봐준다는 말 안 듣고 싶어서 내 말 더 빨리 끊은 적 있어?”

도윤은 한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있었겠지.”

나는 그 말을 들으며 화가 다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설명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설명이 된다고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나만 손해네.”

내가 말했다.

도윤은 웃지 않았다.

“그렇네.”

짧은 대답이었다. 나는 그가 변명하지 않은 것이 고마웠다.

우리는 회사에서 친구라는 사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공개된 회의에서는 다른 팀원과 같은 기준으로. 기분이 상하면 따로 미루지 말고 표현할 것. 개인적인 부탁과 업무 지시를 섞지 않을 것.

종이에 쓰지는 않았다. 약속이 문서가 되면 도윤이 조항을 고치기 시작할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가 웃었다.

“그 정도는 아니야.”

“그 정도야.”

우리는 또 의견이 달랐다.

집을 나서려는데 어머니가 내 외투를 건네주셨다. 두 사람 대화가 잘 끝난 것 같다고 하셨다. 나는 도윤을 봤다. 그도 나를 봤다.

“아직이요.”

내가 말했다.

“앞으로도 좀 싸울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그러면 싸우고 밥은 같이 먹으라고 하셨다. 도윤이 그게 무슨 해결이냐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제일 낫다고 했다.

현관문이 닫히기 전 도윤이 말했다.

“내일 회사에서 보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부터 듣던 말이었다. 한 달을 지나 다시 듣는 그 말이, 그날은 새 약속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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