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읽기

0%

제21장

다시 빨간 불

수빈은 병문안을 와도 되는지 먼저 물었다.

마지막 수정 2026-11-06 · 책으로 읽기

수빈은 병문안을 와도 되는지 먼저 물었다.

도윤에게 확인하니 괜찮다고 했다. 나는 병실 면회 규정을 알아보고 시간을 맞췄다. 그녀가 혼자 오고 싶은지 동행이 필요한지도 물었다. 수빈은 상담을 도와주던 동료와 함께 오겠다고 했다.

그녀는 꽃을 들고 오지 않았다. 작은 편지 봉투를 가져왔다. 도윤은 봉투를 보자 아주 잠깐 굳었다. 수빈도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바로 봉투를 열어 편지지를 꺼냈다.

“그냥 쓴 거예요.”

도윤은 미안하다고 했다. 수빈은 고개를 저었다. 둘은 같은 사과를 서로에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편지는 길지 않았다. 그날 자신을 믿어 줘서 고맙다는 말이었다. 싸우는 연인끼리의 일이라고 지나치지 않은 것이 고마웠다고 했다. 도윤은 편지지를 접지 않고 침대 옆 탁자에 놓았다.

“저는 계속 제 생활을 해 보려고요.”

수빈이 말했다.

“원래 하던 수업도 다시 나가고.”

그녀는 도예를 배운다고 했다. 도윤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수빈에 대해 민재와 관련된 것만 알았다. 무슨 일을 좋아하고 주말에 무엇을 하는지는 몰랐다.

“그릇 만드는 거요?”

내가 묻자 그녀가 웃었다.

“아직은 그릇인지 뭔지 모를 걸 만들어요.”

도윤도 웃었다가 배를 잡았다. 수빈은 놀랐고 나는 괜찮다고 손을 저었다. 도윤이 웃지 말라고 불평했다. 병실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수빈은 민재에 관한 추가 진술을 마쳤다고 했다. 이전의 연락과 찾아온 일들을 정리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따로따로 있던 일이 하나의 흐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전에는 제가 자꾸 잘못 설명하는 줄 알았거든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진술실을 떠올렸다. 순서를 모른다고 해서 일이 없었던 것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도윤이 물었다.

“잠은 좀 주무세요?”

수빈은 요즘은 나아졌다고 했다. 그리고 같은 질문을 돌려줬다. 도윤은 병원이라 잘 못 잔다고 했다가, 전보다 나아졌다고 고쳤다.

두 사람은 서로를 구해 준 사람과 구원받은 사람처럼 앉아 있지 않았다. 각각의 자리에서 일상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사람처럼 보였다.

면회가 끝날 무렵 수빈이 내게도 말했다.

“다치신 데는 괜찮으세요?”

나는 거의 나았다고 했다. 그녀는 내 손을 봤다. 손등의 작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기억나는 건 계속 적고 계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적다가 힘들면 멈춰요. 끝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못 하겠더라고요.”

그 말이 내게 필요했다. 나는 밤마다 사건 메모를 열어 누락된 것을 찾고 있었다. 틀린 진술을 할까 봐서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다시 일어나지 않게 만들 방법을 찾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수빈이 떠난 뒤 도윤은 편지를 서랍에 넣었다. 검은 봉투를 넣었던 서랍과는 다른 서랍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 움직임을 봤다.

“좋은 사람이지?”

그가 물었다.

“응.”

“그냥 잘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병실 창밖을 봤다. 주차장에서는 차들이 들어오고 나갔다. 잘 산다는 말이 그날은 거창하지 않았다. 수업에 가고, 잠을 자고, 누가 따라오는지 돌아보지 않고 걷는 것.

친구가 말한 소원에는 자기 몫도 들어 있을 것 같았다.


두 번째 장애는 임시 팀장이 된 지 열흘째 되는 날 발생했다.

이번에는 상태판이 빨갛게 변했다. 알기 쉬운 장애라고 해서 쉬운 장애는 아니었다. 연계 요청이 밀렸고, 복구 절차대로 우회했지만 일부 거래가 늦게 처리됐다. 현장 문의가 동시에 들어왔다.

나는 처음 삼십 분 동안 내가 직접 원인을 봤다. 오래 해 온 일이었다. 화면 앞에 앉으면 손이 먼저 움직였다. 어디를 열고 어떤 기록을 나란히 놓아야 하는지 알았다.

문제는 그동안 아무도 전체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계열사 담당자는 누구에게 전화해야 하느냐고 물었고, 윤 부장은 왜 보고가 없느냐고 했다. 유진이 내 옆에서 세 번 이름을 불렀다. 나는 세 번째에야 고개를 들었다.

“차장님, 지금은 제가 볼게요. 연락을 받아 주세요.”

나는 마우스를 놓지 못했다.

“여기만 확인하면…”

“그건 제가 확인할 수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단단했다. 나는 그제야 의자를 밀었다.

회의실로 들어가 영향 범위를 적었다. 장애 시작 시각, 현재 증상, 조치 내용, 다음 안내 시간. 도윤이 벽에 붙여 두었던 양식을 처음으로 펼쳤다. 왜 출력해 뒀느냐고 놀렸던 종이였다.

나는 십오 분 뒤 다시 알리겠다고 했다. 원인 설명은 아직 못 했다. 현장 담당자가 그럼 뭘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나는 아는 사실부터 말했다. 모르는 것은 확인 중이라고 했다. 다음 안내 시각을 다시 말했다. 그때만큼은 긴 설명보다 지킬 약속 하나가 필요했다.

유진은 준서와 함께 지연 구간을 좁혔다. 협력사 담당자가 특정 작업과 시간이 겹친다고 알려 줬다. 첫 장애와 비슷해 보였지만 조건이 달랐다. 나는 섣불리 같은 원인이라고 쓰지 않았다.

한 시간 십 분 뒤 서비스가 안정됐다. 복구와 원인 확정을 나눠 알렸다. 내 문장은 도윤의 문장과 닮아 갔다. 목소리까지 닮고 싶지는 않았다.

오후 회고에서 준서가 말했다.

“예방 로직을 추가하면 같은 형태의 요청 집중은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피곤했다. 오전 내내 전화를 받았고 점심도 못 먹었다. 머릿속에는 원인을 확정하라는 부장의 말이 남아 있었다.

“그건 이번 장애랑…”

거기까지 말하고 멈췄다.

준서가 입을 다물었다. 펜 끝이 종이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내 목소리를 처음 듣는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회의실에 도윤은 없었다. 그런데 그의 문장이 내 입에서 나왔다.

“잠깐. 내가 말을 잘못 시작했어요.”

나는 물을 마셨다.

“원인하고 별개로 할 수 있는 개선이라는 거죠? 끝까지 설명해 주세요.”

준서는 나를 보다가 자료를 넘겼다. 준비한 내용이었다. 내가 처음 장애 회의 때 준비했던 다음 장처럼.

회의가 끝난 뒤 혼자 남았다. 유리벽에 비친 얼굴이 지쳐 보였다. 나는 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이해했다.”

말이 먼저 나갔다.

도윤이 물었다.

“뭘.”

“왜 그렇게 말했는지.”

그는 잠깐 조용해졌다.

“그렇지?”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도 알겠더라.”

전화기 너머에서 낮은 웃음이 났다. 도윤은 이번에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었다.

“장애는 잡았냐.”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응. 유진이하고 준서가.”

그 이름을 정확히 말하는 것이 그날 내 마지막 일이었다.

COMMENTS · 제21장

다시 빨간 불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읽다가 궁금한 점이나 보탤 내용을 남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