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없는 이름
연말 업무 정리 양식이 내려왔다.
연말 업무 정리 양식이 내려왔다.
나는 아직 임시 팀장인데도 팀 실적을 묶어 제출해야 했다. 도윤이 자리를 비운 기간은 숫자 하나로 표시됐다. 담당 공백 대응. 그 네 글자 아래 한 달 동안의 밤과 병원과 전화가 들어갔다.
양식에는 사고 대응을 주요 성과로 넣을 수 있는 칸이 있었다. 나는 비워 뒀다. 사람을 제압한 일을 개인 성과처럼 쓰고 싶지 않았다. 업무 지속을 위해 팀원들이 나눠 맡은 부분은 따로 적었다.
유진은 자기 이름이 두 군데 들어갔다고 했다. 나는 실제로 두 가지를 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녀는 그중 하나는 준서가 많이 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름을 더했다.
그동안 내가 받은 평가표에도 이런 보이지 않는 수정이 있었을 것이다. 누가 내 이름을 넣고 뺐는지 나는 몰랐다. 도윤이 팀장이 된 뒤 내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보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끊은 순간을 더 오래 기억했다.
수치로 대우받는 것과 사람으로 존중받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었다. 둘 다 필요했다.
나는 예전 평가 면담 기록을 찾아봤다. 도윤은 내가 문제를 넓게 보고 우회 방법을 빨리 찾는다고 적었다. 반대로 근거 정리가 늦을 때가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흠을 잡는 말로만 들었다. 지금 읽으니 장점도 분명히 적혀 있었다.
그렇다고 그날 면담이 즐거워지지는 않았다. ‘오래하셨으니까 이 정도는’이라는 말을 들으며 앉아 있었던 기억은 그대로였다.
병원에 갔을 때 나는 평가표를 봤다고 말했다. 도윤은 왜 갑자기 그런 걸 보느냐고 했다. 나는 팀 실적을 정리하다가 봤다고 했다.
“너 나 평가 좋게 썼더라.”
내가 말했다.
그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잘한 게 있으니까.”
“그 말은 얼굴 보고도 좀 해.”
도윤은 물컵을 내려놓았다. 내가 농담하는 줄 알았는지 웃으려다가 멈췄다.
“안 했나.”
“서류에 쓰는 거랑 듣는 건 다르더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참 뒤 말했다.
“네가 팀 맡아 줘서 다행이야.”
나는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듣고 싶었던 말을 들으면 오히려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몰랐다.
“그럼 다음 평가도 잘 써.”
내가 말했다.
도윤은 웃었다.
“그건 따로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참 듣기 싫게 맞는 말이었다.
회사로 돌아와 성과표의 빈칸을 다시 봤다. 여전히 사고 대응이라는 항목은 넣지 않았다. 대신 팀 내 업무 공유 정비를 적었다. 도윤이 돌아오면 같이 유지해야 할 일이었다.
도윤의 사건은 회사 안에서 두 번째 이야기가 됐다.
처음 이야기는 표창을 받은 직원이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친구를 구하다 크게 다친 팀장이었다. 두 이야기 사이에 있던 협박과 의심, 팀원들의 불편함은 빠졌다. 사람들은 짧고 분명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홍보실에서 연락이 왔다. 직원 간 연대와 위기 대응을 다룬 사내 기사를 준비하고 싶다고 했다. 도윤과 내 의사를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않았다.
도윤에게 묻자 그는 싫다고 했다.
“내가 상 받은 거 자랑할 때도 이럴 줄 몰랐는데, 이번엔 더 싫어.”
“처음에도 네가 자랑한 건 아니잖아.”
“동의했지.”
나는 전화기를 내려다봤다. 동의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에게 다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홍보실에는 두 사람 모두 원하지 않는다고 전달했다. 담당자는 알겠다고 했다. 더 설득하지 않았다. 나는 뜻밖에 안심했다. 회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우리에게 이야기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문은 동의를 받지 않았다. 민재가 수빈의 전남편이라는 말, 우리 회사 직원이었다는 말, 도윤이 예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 돌았다. 어느 것도 우리가 확인한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팀원들에게 아는 것 이상을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수빈의 개인정보도 필요 없이 공유하지 않도록 했다. 준서가 다른 팀에서 질문을 받았다고 했다.
“그냥 팀장님 회복 중이라고만 했어요.”
“잘했어요.”
나는 대답했다. 더 말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도 일이었다.
남 형사에게서는 일부 기록 확인을 위한 추가 질문이 왔다. 나는 민재와 맞닥뜨리기 직전에 준서에게 전화가 왔던 사실을 말했다. 통화 기록으로 시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 진술 때는 그 통화를 빼먹었다.
빠뜨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남 형사는 지금이라도 확인된 내용을 추가하면 된다고 했다. 기억이 돌아오는 순서가 사건의 순서와 같지는 않다고 했다.
나는 도윤에게 그 말을 전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문을 누가 먼저 잡았는지 잘 모르겠어.”
“네가 나 밀어 낸 건 기억나.”
“그건 나도.”
우리는 그 뒤를 말하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냈다.
“너 나 때문에 다쳤다고 생각해?”
도윤은 나를 봤다. 병실에는 잠깐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다친 건 그 사람이 찔러서야.”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알아.”
“너는 그 자리에 있었고. 나도 있었고.”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네가 다쳤으면 나도 같은 생각했겠지.”
그 말에는 위로보다 피로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설득할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그래도 책임을 제자리에 놓으려 애썼다.
잠깐 뒤 도윤이 말했다.
“내가 나가자고 했다면 네가 말렸겠지?”
“말렸지.”
“그날도 말렸잖아.”
나는 정문에서 그에게 가지 말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사진을 받았을 때 우리는 기다렸다. 계획적으로 위험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사건은 일어났다.
잘못한 선택 하나를 찾으면 다시는 같은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조치를 했어도 다른 사람이 해를 끼칠 수 있었다.
병원을 나와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사건 메모에서 ‘내가 다른 쪽으로 갔다면’이라는 문장을 지웠다. 사실을 적는 메모에 가능하지 않은 시간을 넣어 두고 있었다.
빈칸이 생겼다. 나는 그 자리에 오늘 받은 추가 질문의 답을 적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쪽이었다.
COMMENTS · 제24장
없는 이름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읽다가 궁금한 점이나 보탤 내용을 남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