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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당반대의 이유

제20장

반대의 이유

윤 부장이 원한 것은 숫자 하나였다.

마지막 수정 2026-11-06 · 한 번에 펼쳐 읽기

윤 부장이 원한 것은 숫자 하나였다.

다음 주 안에 처리 가능. 보고서에는 그렇게 쓰면 됐다. 실제 상황은 달랐다. 계열사 시험 결과가 아직 오지 않았고, 협력사 작업 시간도 확정되지 않았다. 나는 조건부 가능이라고 썼다.

부장은 그 표현을 싫어했다.

“조건 안 붙는 일이 어디 있어. 위에서는 된다는 건지 안 된다는 건지만 봐.”

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부장은 끝까지 듣지 않았다.

“관련 없는 세부 사항 말고.”

그 순간 도윤의 얼굴이 떠올랐다. 같은 문장이 다른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렇다고 도윤이 그 말을 그대로 내게 옮긴 것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연결을 처음으로 또렷하게 봤다.

사무실로 돌아와 자료를 다시 읽었다. 어느 부분이 결정에 필요한 사실인지, 어느 부분이 내가 불안해서 덧붙인 설명인지 나눴다. 절반쯤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빠뜨리면 안 되는 두 조건은 남겼다.

유진에게 읽어 달라고 했다. 그녀는 바로 이해된다고 했다. 나는 그 문서를 들고 다시 부장에게 갔다.

“여기 두 조건이 해결되면 다음 주 가능합니다. 안 되면 일정이 밀립니다. 가능만 적으면 그 뒤 책임 범위가 달라집니다.”

부장은 귀찮다는 얼굴을 했다. 그래도 문서를 받았다.

도윤이 매번 옳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위에서 내려온 애매함을 아래에서 견디게 하지 않으려면, 누군가는 불편한 문장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점심에 병원으로 전화했다. 도윤은 복도를 걷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아까 일을 짧게 말했다.

그가 물었다.

“그래서 승인받았어?”

“아직.”

“그럼 조건별 영향 시간을 써. 일정이 몇 시간 밀리는지 보여 줘야 돼.”

나는 눈을 감았다.

“오늘은 그냥 욕해 주면 안 되냐?”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부장 진짜 짜증 나네.”

나는 웃었다.

“그래. 그거면 됐어.”

“근데 영향 시간은 써.”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그가 아프다고 해서 내가 먼저 멈췄다.

통화를 끊은 뒤 나는 시간표를 붙였다. 부장은 그것을 보고 조건부 일정에 동의했다. 도윤의 조언은 쓸모가 있었다. 문제는 쓸모 있는 말이 언제나 필요한 첫 번째 말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오후에는 준서가 작업 검토를 받으러 왔다. 설명이 길었다. 관련 없는 부분도 있었다. 나는 짧게 하라고 말하려다가 노트를 폈다.

“지금 제일 결정해 줬으면 하는 게 뭐예요?”

준서는 잠깐 생각하고 두 가지를 말했다. 나는 그 두 가지부터 봤다. 나머지 설명이 절반으로 줄었다.

그렇게 물으면 됐을 일이었다.

저녁에 도윤에게 결과를 알려 줬다. 그가 ‘역시’라고 답했다. 나는 바로 ‘네 덕만은 아니고’라고 보냈다. 그는 엄지를 든 그림을 보냈다. 그 나이에 그런 그림을 고르는 모습이 상상돼서 웃음이 났다.

집에 돌아와 서연에게 말했다.

“팀장 한다고 다 알게 되는 건 아니네.”

서연은 식탁을 닦으며 말했다.

“원래 알던 것도 못 보게 될 수 있지.”

나는 다음 날 할 일을 적었다. 승인 일정, 인력 조정, 계열사 회신. 맨 아래에 하나를 더 적었다.

‘끝까지 듣기.’

너무 당연해서 업무 목록에 넣기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적어 둘 필요가 있었다.


임시 팀장이 된 뒤 서연과 처음 다툰 이유는 회사가 아니었다.

나는 저녁 여덟 시까지 들어오겠다고 했다. 여덟 시 이십 분에 연락했고 아홉 시 십 분에 집에 왔다. 식탁에는 덮개가 씌워진 반찬이 있었다. 지우는 먼저 밥을 먹고 방에 들어갔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내가 말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알아. 연락은 미리 할 수 있었잖아.”

나는 하루 종일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그녀는 그 전화 중 하나를 집에 먼저 할 수는 없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도윤에게 늘 하던 말이 떠올랐다. 상황이 바뀌면 알려 달라. 기다리는 사람이 알아서 추측하게 하지 말라. 나는 회사에서는 다음 안내 시간을 적으면서 집에서는 아무 시간이나 흘려보냈다.

“미안해. 다음엔 늦어지기 전에 연락할게.”

나는 말했다.

서연은 반찬을 데웠다. 사과를 받았다고 곧바로 웃지는 않았다. 나는 그 시간을 견뎠다. 이제 사과를 하면 바로 관계가 정상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식사 뒤 나는 지우 방에 들어갔다. 아이는 종이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아빠가 오늘 같이 해 주기로 했다고 했다. 나는 그 약속을 기억하지 못했다.

지우는 괜찮다고 했다. 괜찮다는 말이 얼굴보다 빨랐다. 회사에서 준서가 하던 말과 같았다.

나는 바닥에 앉았다.

“지금 해도 돼?”

아이가 나를 봤다.

“늦었는데.”

“십 분만. 나머지는 내일.”

우리는 십 분 동안 종이 다리를 만들었다. 다리는 지우의 지우개를 올리자 무너졌다. 나는 구조를 설명하려다 멈췄다. 아이가 먼저 다시 접어 보겠다고 했다. 나는 테이프를 잘라 줬다.

밤에 도윤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받지 않고 지금은 가족과 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급한 일이면 내용을 남겨 달라고 했다. 그는 급하지 않다고 답했다.

나는 그 답을 보고 안심했다.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 사람을 버리는 일은 아니었다. 필요할 때 다시 연결할 수 있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서연이 말했다.

“당신이 도윤 씨 마음 아는 건 좋은데, 똑같이 살 필요는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를 이해하는 일에 너무 몰두하면 내 생활을 그 사람의 설명으로 채울 수도 있었다.

다음 날 달력에 지우와 할 일을 적었다. 회사 회의와 같은 색은 쓰지 않았다.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누가 더 중요한지 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다른 쪽을 아무 말 없이 먹어 버리지 않게 하려는 구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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